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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금산군 문화재

by 별이 빛나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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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금산군 문화재
충남 금산군 소재 문화재 현황입니다.

충청남도 금산군 문화재

 

충청남도 금산군 소재 문화재 현황입니다.

 

구분 문화재명 소재지 지정번호 시대 소개
국가지정문화재 금산 칠백의총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 일원 사적 제105호 조선시대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금산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을 무찌르다 순절한 조헌과 영규대사를 비롯한 칠백의사를 모신 곳이다.

조헌(趙憲, 1544~1592)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87년 정여립(鄭汝立)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고, 또한 이산해(李山海)를 논박하는 소를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에 머물던 1589년에도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 연곤평(延崑坪)으로 가서 8월 18일 전라도로 진격하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모두 전사하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영조 10년(17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고종 20년(1883) 문묘에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 ~1592)의 속성(俗姓)은 밀양 박씨이며,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계룡산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3일 동안 통곡한 후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으며, 조헌과 함께 청주성의 왜적을 쳤고, 다시 금산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큰 부상을 입고 계룡면 월암리로 돌아간 후 사망하였다.

금산에서 왜군이 퇴각한 후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 전승업(全承業) 등이 모든 유골을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이를 칠백의총이라 하였으며, 백성들이 해마다 시향(時享)을 지냈다. 선조 36년(1603)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인조 12년(1634) 순의단(殉義壇)이 설치되어 제향을 올렸다.

인조 25(1647)년에 종용사를 세워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현종 4년(1663)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며, 그후 옆에 종용당서원(從容堂書院)이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나, 금산군 사람들이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여 광복 후 1952년에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였다.

1963년 1월 정부에서는 사적으로 지정한 후 종용사, 의총문, 취의문, 순의비각 등을 새로 세우고, 1977년에 기념관을 신축하였다.
국가지정문화재 조헌 관련 유품 (趙憲 關聯 遺品)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 보물 제1007호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이 남긴 7점의 유물이다.
국가지정문화재 금산 요광리 은행나무 충남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329-12 천연기념물 제84호 신라시대 이 은행나무는 신라 때부터 자연정자(自然亭子)를 이루었다고 전해지므로, 나무의 나이는 약 1,000년 정도로 추정된다.

500여 년 전 전라감사(全羅監司) 오모씨(吳某氏)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행정헌(杏亭軒)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율곡 이이(栗谷李珥)의문집에도 이곳의 행정명칭이었던 진산(珍山)에 큰 은행나무가 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조선전기에도 이름 있는 나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쪽 및 동쪽으로 향한 가지는 오래 전에 부러져 없어지고, 다만 북쪽으로 뻗은 가지만이 남아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원줄기는 내부가 썩어서 동굴처럼 비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으며, 잎을 삶아서 먹으면 노인의 해소병이 치유된다고 한다.
국가지정문화재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30 일원 천연기념물 제365호 조선시대 8보석사 입구에 서 있는 은행나무이다.
이 나무는 중심가지가 곧바로 솟아올라 높이가 40여 m에 이르며 옆으로가지가 뻗어 있어 그 폭이 50여 m가 되는 노거수(老巨樹)로, 나이는 1,000년 이상으로 추정한다.
장엄하고 위압적인 외형을 갖추고 있으며 수간(樹幹: 중심가지)은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어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앞산의 암석(岩石)에서 금을 캐어 불상을 주조하였다 해서절 이름이 보석사(寶石寺)라고 붙였고 이 은행나무는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이 나무가웅장한 소리를 내어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여겨져 온나무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목조각장 전기만 충남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정보 미제공 1929년생으로 체계적인 전승계보를 갖고 있지는 않으나, 어릴 적부터 목조각을 취미삼아 스스로 반복 숙련하였고, 1958년 이래 주로 목제탈 제작분야에 종사해오면서 기능을 한층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동아일보 주최 공예전등을 무대로 활약하는 등 이 분야에서 일정한 명성을쌓기도 하였다.1970년대에 들어서 불교조각분야에 본격 입문한 이래30여 년 동안 일관되게 동일분야에 종사해 오면서200여 구가 넘는 각종 형식의 불교조각을 완성하는등 다양하고 폭 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특히 불상의양식에서 통일신라의 고전양식과 조선시대의 불상이가진 독특한 고전양식의 한 전형을 시도하고 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원만하고 무리없는 완성도를 보이고있다.

1984년 해인사 암자 불사에 참여한 이래 1995년까지10여 년간 해인사 경내에서 조각작업을 지속해 오는동안 여러 승려들로부터 불교도상의 세계에 대해 폭넓게 공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특히 중요무형문화재제48호 단청장 기능보유자인 임석정(林石鼎)으로부터불교조각의 도상과 종교성의 측면에 대해 현재까지 지속적인 지도와 자문을 받아 종교조각으로서의 완성도제고에 노력하고 있다.
도지정문화재 신안사 대광전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신안사로 970 일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조선시대 후기 신안사는 금산군 제원면 동북쪽에 있는 신음산(神陰山)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주변에 국사봉과 연신봉 등 여러 산봉우리가 마치 연꽃이 만개한 형국을 이루고 있어 연화도량(蓮花道場)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진평왕 5년(583)에 무염선사(無染禪師)가 창건한 것으로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신안사라는 절의 이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927~935)이 주위 산수의 경치가 아름답고조용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편안하다고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원래 신안사에는대광전(大光殿)극락전(極樂殿)진향각(眞香閣)요묵당(寥默堂)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극락전과 대광전만 남아 있다. 대광전은 서향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졌다. 기단은자연석을 쌓아 만들었고, 내부에는 석가모니가 설법한 진리를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약사여래석가여래불을 봉안하고 있다. 정면 5칸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의 3칸에는 후불벽과 불단(佛壇)을조성하였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도지정문화재 금산 천내리 용호석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1006-45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 고려말∼조선시대 용과 호랑이 모습을 각각 2기(基)의 돌에 새긴 것이다. 천내리의 서쪽을 흐르는 천내강변 제원대교(濟原大橋)에서 북쪽 100m 지점에 용석(龍石)이, 그로부터 다시 북쪽으로 500m 지점에 호석(虎石)이 위치하고 있다. 용석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여러 개의 돌기와 그 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가 조각되어 있고,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입 양편에는 아가미와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호석은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두툼하게 튀어나온 곡선과 동그라미를 조각하여 호랑이의 털 무늬를 만들었다. 호석의몸체는 서쪽을 향하였으나 머리는 북쪽을 향하였으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안동(安東)으로 내려온 공민왕이자신의 능묘(陵墓)의 위치를 정하고 필요한 석물(石物)로 준비하게 하였으나, 개경(開京)으로 돌아간 후 그대로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도지정문화재 신안사 극락전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신안사로 970 일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조선후기 제원면의 북쪽 면계를 이루고 있는 국사봉 남록에 있는 신안사의 부속건물이다. 대광전의 남서쪽에 남향하고 있는 극락전은 자연석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아 정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를 갖고 있다. 정면에 모두 4분합문(分閤門)을 달았고 내부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를깔았다. 후면의 가운데 칸에 내고주(內高柱)를 세워 여기에 후불벽을 만들고 불단을 조성하였다. 기둥 상부를 짜고 있는 창방 위에 평방을놓고 각 칸에 2포를 배치한 다포식 건축이다. 공포는 내4, 외3출목이며 바깥으로 나온 우설(牛舌)은 앙서형상을 이루었고 안으로는 운궁(雲宮)을 조각하였다. 지붕은 앞면에 배치된 공포 상부와 내고주 사이에 대량을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배치한 2중량(重樑) 7가연(架椽)의 가구이며,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신안사는 기록이 없으나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5년(583)에 무염선사(無染禪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고증할 길은 없으며, 일설에는 경순왕이 영동(永同)의 영국사(寧國寺)에서 수학할 때 가끔 이곳에 와서 머물렀는데 경치가 아름답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18세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도지정문화재 금산 신안사 아미타삼존불상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신안사로 970 일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7호 조선전기 본존불 좌우에 합장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배치한 형태이다. 전체 크기가 장대하고 위엄있는 모습의 삼존불로 조각 또한 매우 훌륭하다. 제작기법면에서 나무로 틀을짜고 흙과 삼베를 입히고 개금을 한 전형적인조선시대 불상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에 유행했던 아미타, 관음, 지장보살상의 삼존불 형식이라던지, 본존불은 좌상 협시불은 입상으로 구성된 점은 고려후기 양식인반면 본존불의 넓적한 얼굴모습과 마치 털모자를 쓴 듯 덥수룩하게 횡으로긴 머리와 옷주름이 간략해지는 경향 그리고 다리를 풀어 편하게 앉은 자세등은 조선전기에 유행했던 불상의 특징이다.
도지정문화재 태조대왕태실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1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조선시대 초기 태실은 왕실의 태(胎)를 묻은 석실(石室)이다. 이 태실은 만인산의산봉우리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태봉(胎封) 터널 위 산봉우리에 조성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말 조선초에 한 시인이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과 명승고적(名勝古蹟)을 두루 돌아볼 때 만인산을 보고, 산의 모양이 깊고 두터우며 굽이굽이 겹쳐진 봉우리는 연꽃이 만발한 것 같고 계곡의 물이 한 곳으로 모여든다고 찬양하였다. 왕실에서 이 소문을 듣고 지관(地官)을 보내이곳을 답사한 결과 시인의 말과 같았다. 1396년(태조 5년)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지시로 남쪽 산허리에 태조(太祖)의 태실을 만들어 태(胎)를 안치하고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다. 이후 만인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고도 하였다.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에 있는 왕실의 태(胎) 항아리를 서울로 옮겨갈 때 태실 구조는 파괴되었고, 최근에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여러 석물(石物)을 모아복원하였다.
도지정문화재 보석사 대웅전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30 일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조선시대 말기 7벌대로 높게 자연석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덤벙주초석을 두고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다포식(多包式) 건물로 기둥 사이에 주간포(柱間包)를 1구식두었다.공포는 내외 3출목(出目)으로 짰는데 내부로는 살미첨차의 양측면을 한몸으로 형성하여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고 첨차와 내단(內端)을 설형두공(雪形工)으로 처리하여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인 외관을 갖추고 있다. 이런 요소들은 조선 후기의 건물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들이지만 외부는 제공(諸工)의 형상이 강건하고 내외 출목수가 같은 것은 조선중기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가구(架構)는 전.후 평주(平柱) 위에 대량을 걸고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짠 2중량(重樑) 5가연(架椽) 가구인데 그 종량(宗樑) 상단면에 맞추어우물천장을 깔았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의 앞쪽 오른편에 의병 승장 영규대사(義兵僧將靈圭大師)가 머물던 의선각(毅禪閣)(문화재자료 제29호)이 있다
도지정문화재 금산 양지리 팽나무연리목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양지장동길 12 일원 충청남도 기념물 제167호 정보 미제공 이 나무는 금산읍 양지리 장동이 마을 노인회관 옆에 있다. 금산 양지리 팽나무연리목 2주는 나이가 약 1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0m, 가슴높이 둘레는굵은 줄기 1.74m, 가는 줄기 1.44m이다.연리목(連理木)은 나무와 나무가 맞닿아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이며, 금산 양지리연리목은 부부의 사랑이 담긴 전설과 함께 팽나무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한 연리목이다.
도지정문화재 금산 백령성 충남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산1외 1필 충청남도 기념물 제83호 백제시대 백령성은 남이면 건천리와 역평리 선치산(해발759m) 동쪽의 정상부에 쌓은 석성으로, 금산군 제원면과 추부면을 지나 충북 영동과 옥천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는 산 정상 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이며, 성의 둘레는 207m이다.성벽의 동남북쪽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서벽은 최대 7m정도 높이까지 남아있다. 성벽의 너비는 4m이다. 2004,2005년 2차에 걸쳐 남문지 및 북문지,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내부에서 목곽과 백제의관리명이 새겨진 명문기와 및 주거지 등이 확인되었다.유물로는 백제시대 각종 명문기와를 포함한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도지정문화재 금산향교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비단로 298 일원 충청남도 기념물 제121호 정보 미제공 향교는 조선시대의 관립교육기관이자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는 곳으로,고을마다 건립되었다. 금산향교는 원래조선 초기에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1684년(숙종10년)에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孔子)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철(先哲)을, 동무와 서무에는우리 나라의 18현(賢)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가을로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배향된 인물의 배향 순서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왔다. 명륜당(明倫堂)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이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유생들의숙소였다. 그밖에 동재각(東齋閣)과 서재각(西齋閣),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등이남아 있다.
도지정문화재 진산향교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교촌1길 45-20 일원 충청남도 기념물 제122호 조선시대 향교는 조선시대의 국립 교육기관이자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는 곳으로, 고을마다건립되었다. 진산향교는 원래 조선 초에 진산면 읍내리 606번지(현재의 진산중학교자리)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보수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755년(영조 3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은 후 다시 보수를 하였고 1950년 6.25전쟁으로훼손된 후 다시 보수(補修)하였다.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孔子)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철(先哲)과 우리나라의 18현(賢)의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로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배향된 인물의 배향 순서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인 명륜당(明倫堂) 이외에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전교실(典敎室) 등이 남아 있다.
도지정문화재 금산 이치대첩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로 191 일원 충청남도 기념물 제154호 정보 미제공 이치(梨峙)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경상도와 충청도 일대를 휩쓸고 승승장구하던 1만여 병력의 일본군이 호남으로 나아가 군량미를 얻고자 이곳을 넘으려고 하였다. 이 때 먼저 길목을 지키고 있던 권율(權慄) 장군이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결사적으로싸워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이로써 전주성(全州城)과 호남평야를 지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리를 장식한 이 싸움을 이치대첩 또는 이치싸움이라고 하며, 여기에 힘입어 이후권율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도지정문화재 금산 물페기농요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물페기길 48 일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6호 정보 미제공 평촌리 물페기(일명 水村) 마을 일대에서 약 200년 전부터 전해오는 농요로, 농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노래와 동작으로 표현한것이다. 충남에서는 드물게 전승(傳承)되어 오는 농사에 관계된 소리인데, 평야지대와 산악지대의 소리가 결합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있다. 토지신에게 비는 제사, 모심는 소리, 두렁밟기, 아시매기, 두렁고치기, 재벌매기, 방아소리, 쌈싸는 소리, 장원놀이 등으로 구분된다. 이 마을은 금강 상류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가 조금만 오면 심하게 물이 잠겨, 물페기라고 불렀다고 하며, 현재는 둑이 완성되어 있다. 이 농요는 마을의 결속과 협동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이어져 왔으며, 1991년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선 국총리상을 수상하였고, 마을에서 물페기농요보존위원회결성하여 보존에 힘쓰고 있다.
도지정문화재 금산 농바우끄시기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평촌2길 1 일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2호 정보 미제공 금강변 어재리 느재마을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과 제원면(濟原面) 일대에서 치러지는 기우제이다. 농바우끄시기는 농(籠)바위끌기라는 뜻으로, 농바우는 느재마을에서 동남쪽 약 350m 떨어진 시루봉 중턱에 있는 바위로, 그 모습이 반닫이 농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30대 이상 부인들이 주도하는데, 바위아래 계곡물에 여인네들이 알몸으로 떼지어 들어가 바가지로 물을 퍼 끼얹으며 물장난을 치고 놀면, 하늘이비를 내린다는 기우(祈雨)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비를 기원하며 병에 솔가지를 꽂아 거꾸로 메다는 물병매기, 짚으로 지름 20cm, 길이 200m의 동앗줄을 꼬아 농바우에 거는 용줄매기, 아낙들이 농바우에서 비오기를 기원하는 산제, 아낙들이 농바우 아래 계곡물에 옷을 벗고 떼지어 들어가 키로 물을 까부는 날궂이 등으로 구성되며, 풍물을 치며 노는 풍장굿과 마마굿으로 마무리한다. 이때 선소리꾼이 농바우에 올라 소리를 매기면, 건너편 언덕에 양쪽으로 길게 줄을 잡은 아낙들이 번갈아가며 농바우를 끄신다. 현재 양철규씨가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고, 1993년에 보존회가 구성된 이후 금산인삼축제, 금강민속축제 등에 참여하여 활발한 전승활동을 펼치고 있다.
도지정문화재 금산인삼백주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파초길 23 일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정보 미제공 금산 인삼백주는 금산의 김녕 김씨(金寧金氏) 집안에 전해오는 전통적인 술 제조법이다. 술을 만드는 방법은 김씨 문중에 전해오는『잡록(雜錄)』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잘게 부순 통밀과 인삼을 섞어 3개월간 발효시켜 누룩을 만든다. 쌀로 고두밥을 짓고준비해두었던 누룩과 인삼을 섞어 밑술을 만든다.여기에 다시 약쑥·솔잎·인삼·고두밥을 섞어 40~60일간 숙성시킨다. 술이 다 익으면 압착기를 이용하여 거르고 고리를 써서 증류한다. 알코올 농도는 43% 정도이며, 인삼향기가 나며 빛깔이 부드럽다. 기능보유자인 김창수씨는 김문기의 18대손으로, 어려서부터 술빚는 광경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술과 인연을 맺었고 조모와 모친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계승해오고 있다. 1994년에는 농림부로부터 전통식품 명인 2호로 지정되었으며, 고향인 금산에서 20여 년간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다. 200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ASEM(아시아 유럽정상회의)에서 공식 건배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도지정문화재 금산 미륵사 석조불두 및 마애불편 일괄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동구들길 163 일원 유형문화재 제209호 고려시대 추정 미륵사 뒤편 암벽에 선각으로 옷주름을 새긴 뒤 그 위에 불두를 얹은 마애불이 있고 그 앞에는 깨져 일부만 남아 있는 석조삼존불입상이 위치한다. 삼존불은 본존불의 몸체 일부와 좌협시보살상의 일부가 큰 암벽에 얕게 선각되어 남아 있으며 그 주위에는 선각된 보살상들이 여러 편으로 나뉘어져 주위에 산재한다. 석조불두는 코가 깨져 일부만 붙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통통한 빰에 양감 있는 모습이며 측면향을 한 보살상은 손에 여의를 들고 있어 문수보살로 추정되며 보살상의 얼굴은 좌우 모두 본존을 향해 측면으로 서 있는데 자연스러운 자세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깨진 부분에 남아 있는 옷주름도 부드럽고 유려하다. 삼존불의 얼굴이나 선각이 유려하고 조형적으로 우수하며 예술적으로 뛰어난 삼존불상은 매우 귀한 사례이다. 더욱이 여의를 든 문수를 포함한 석가삼존불은 불화에는 보이지만 조각으로는 거의 없는 도상적 특징을 보이고 있어 불교사적 가치가 높다.
도지정문화재 금산 보석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30 일원 유형문화재 제214호 정보 미제공 삼존좌상 모두 둥글넓적한 얼굴, 반듯한 코에 반개한 눈과 입매가 살짝 올라간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룬 단정한 인상을 하고 있으며, 어깨가 폭이 넓고 허리가 길며, 무릎 폭이 넓어 전체적으로 균형있고 안정감이 있다. 석가불은 변형우견편단을 입고,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옷주름 표현도 유연하면서 힘이 있음.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불과 같이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를 하고 있다. 다만 문수보살은 어깨에 천의를 걸치고 보현보살은 편삼에 대의를 걸친 착의법을 하고 있으며, 서로 반대반향으로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점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문수보살은 배부분에 화문장식이 있고 양 무릎에는 장식구가 있는데 이는 복갑과 갑대의 단순한 형태로 여겨진다. 보석사 석가여래삼존좌상은 복장물이나 발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형적인 17세기 석가여래삼존불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지정문화재 금산농악 충청남도 금산군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53호 정보 미제공 금산농악은 마을굿과 걸립굿의 요소를 함께 갖추고 있다 판굿의 각 과정이 모두 독자적이면서 장단이 내고 푸는 기승전결의 완결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판굿은 앞굿과 뒷굿으로 나누어지는데 앞굿은 악기와 개인놀이가 중심이며 뒷굿은 잡색들의 춤사위 위주로 구성되어 음악적, 연희적 요소가 모두 나타난다. 금산농악은 자생적으로 전승 및 전문화과정을 거친 것이 특징이다. 해방이후 여러 마을을 상대로 하는 걸립농악으로 발전하였고, 더 나아가 전국을 상대로 한 전문적인 예인집단으로 특화되었다. 금산농악의 계보는 상쇠인 김수동으로부터 김병화, 박희중, 정인삼에서 현 금산농악보존회로 계승되고 있다. 금산농악은 호남좌도농악의 특징을 지닌 완결성 높은 구성과 전승과정의 전통성 등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제 제53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자료 청풍사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246-1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호 정보 미제공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분인 야은 길재(冶隱吉再) 선생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모신 사우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이다. 1761년(영조 37년) 금산군수로 부임한 민백흥(閔百興)이 유림의 요청에 의하여 건축하였고, 마을 이름도 선생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는 충절을 길이 우러러 사모(思慕)하기 위하여‘불이(不二)’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야은 선생은 1353년(공민왕 2년)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났으나, 부친 원진(元進)이 금주지사(錦州知事)로 부임하였을 때 선생도 함께 와서 신씨의 가문에 장가들어 이곳에 살게 되었다. 고려가 망한 후 조선의 태자 방원(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사우 앞에 있는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는 선생의 충절과평생 동안에 한 일을 전해주고 있으며, 뜰에는 선생의 충절이 황하(黃河)의 급류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고 서있는 지주(砥柱)와 같다 하여 세운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가 있다.
문화재자료 금산 충렬사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진산로 356-10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호 정보 미제공 해주 오씨(海州吳氏)의 삼세(三世)에 걸친 4명의 충신(忠臣)인 완월당 오응정(翫月堂吳應鼎)과 큰 아들 욱(稶), 둘째 아들 삼송정 직(三松亭稷),손자 방언(邦彦)의 충혼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1831년(순조 31년)에 세워졌다. 완월당은 임진왜란으로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난할 때 수행하여평양탈환전(平壤奪還戰)에 참가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순천(順天)을 지킨 후 남원성(南原城)에서 첫째 아들 욱(稶)과 함께 전사하였다. 둘째 아들 직(稷)은 1619년(광해군 11년) 후금(後金)을 정벌할 때 강홍립(姜弘立)이 항복하자 백마를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수많은 적을 죽이고 자결하였으며, 손자 방언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항복하자 강에 몸을 던졌다. 이 사우는 일제말기에 일본 경찰이 갖은 책동으로 헐어버리려고 하였으나 유림(儒林)과 오씨 문중의 결사반대로 실패하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20일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문화재자료 용강서원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로 258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 정보 미제공 서원은 후진교육(後進敎育)과 선현봉사(先賢奉祀)를 목적으로 16세기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는 향촌사림(鄕村士林)의 세력결집 장소의 기능까지 갖게 되었다. 이 서원은 1716년(숙종 42년)에 금강 상류인 용강(龍江) 가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 동춘 송준길(同春宋浚吉), 시남유계(市南兪棨) 세 분만을 배향하였고, 18세기 말에미호 김원행(渼湖金元行), 역천 송명흠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발전하다가 1871년(고종 8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어졌으나, 1910년지역 유림들이 헐린 목재로 용강서당(龍江書堂)을 지어 현재 금산지역의 유일한 서원 건물로 남아있다. 이 건물은 오늘날까지 유림들이 계(契)를 통한 회합및 자제교육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문화재자료 조헌사당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수심대길 32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호 정보 미제공 임진왜란 당시 금산성전투에서 순절한 중봉 조헌(重峰趙憲) 선생을 모신 부조사우이다. 부조사우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모시도록 조정(朝廷)에서 지정한 부조묘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선생은 주로 옥천군 안읍 밤티(沃川郡安邑栗峙)에서 생활하였지만, 자주 이 지역에 왕래하면서후손들에게 이곳에서 살 것을 분부하였다고 한다. 이 사우는 원래 1734년(영조 10년)에 곡남리 진동산에 창건되었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 건물이 허물어지면서, 유림(儒林)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뒷편에는 선생이 이름을 짓고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의글씨로 알려진 수심대(水心臺)라고 새겨진 글자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문화재자료 온양이씨 어필각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어필각로 412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호 조선말기 온양 이씨(溫陽李氏) 문중의 5세3효(五世三孝)의 효행이 순종 황제에까지 알려지면서 어필(御筆)을 내려받자,유림과 후손들이 어필비(御筆碑)와 함께 세운 목조 8각의 건물이다. 5세3효는 5세에 걸친 3명의 효자, 즉 이태귀(李泰貴)와 그의 증손(曾孫) 흥엽 고손(高孫)원배(元培)이다. 이들 모두 효행이 탁월하여 순종 황제가 온양이씨계효지려라는 8자의 어필을 내려주었다. 순종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사우를 건립하여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한말에 순절한 충신들을함께 모시고 봄 가을로 제향을 올렸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의친왕(義親王)은 감명하여온양이씨삼효문(溫陽李氏三孝門)및영모당(永慕堂)의 액자(額字)를 내려주었다. 일제시대에 일본 경찰은 사우를헐어 그 목재를 태고종(太古宗)에 팔았으며, 현재 금산읍 상리에 있는 대원정사가 그 건물이다
문화재자료 의병승장비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심천길 12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현종 6년(1840 의병승장(義兵僧將)으로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重峰趙憲)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 영규대사(騎虛堂靈圭大師)의순절사적비(殉節史蹟碑)로서 1840년(헌종 6년)에 보석사(寶石寺) 입구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이는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며, 금산군수 조취영이 글씨를 썼고, 비는 비각(碑閣)안에 있다. 비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승장(義兵僧將)이 새겨져 있으나 자획(字劃)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왼쪽 면에는 창건화주(創建化主) 낙봉대인(駱峯大仁) 등 건립 당시의 관계 인물의 이름을, 오른쪽 면에는 앞면의의병승장을 창녕위 김병주가 썼음을 기록하였다. 1940년 일본 경찰이 비각을 헐고 자획을 훼손하여 땅에 묻혔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자료 권 충민공 순절비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25-1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 조선 고종 15년( 임진왜란 때 이곳 갯터싸움에서 금산군수 권종(權悰)이 순절한 곳임을 새긴 비(碑)이다.권율(權慄)의 사촌형인 금산군수 권종은 1592년 6월 24일 영동(永同)을 거쳐 금산으로 쳐들어오는일본군을 막기 위해, 제원찰방 이극경(濟原察訪李克絅)과 함께 갯터에 진을 쳤다. 천내강(川內江)을 건너오는 일본군과 싸웠으나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적군을 상대하기 어려워 그의 아들과 함께장렬히 전사하였다. 권종의 충절과 공훈을 우러러 사모하여 이승보(李承輔)가 비문을 짓고, 11세손 정호(鼎鎬)가 글씨를써서 1878년(고정 15년)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일제시대 말기에 일본 경찰이 비문을 훼손하려고 하였으나 유림과 후손이 결사적으로 수호하여 보존될 수 있었다.
문화재자료 권율 장군 이치대첩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로 191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호 조선말기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전라도를 침입하려던 일본군을 이치(梨峙, 배티 또는 배재)에서 물리친 사건을 새긴비석으로, 이 전투를 이치대첩(梨峙大捷)이라고 한다. 원래원수권공이치대첩비(元帥權公梨峙大捷碑)는 연재 송병선(淵齋宋秉璿)이 지은 비문을 새겨 금곡사(金谷祠)와 함께1902년 금곡에 건립되었다. 이치대첩 당시 싸울 때 나던 쇠소리가 이치에서 약 10km정도 떨어진 금성면 상가리 금곡(金谷)까지 들렸다고 한다.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금곡에 건립되었던 비와 사우(祠宇)가 파괴되었다. 현재의 비석은 1964년에 진산면 묵산리에서 이치를 바라볼 수 있는 산 중턱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문화재자료 수심대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수심대길 30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6호 조선후기 복수면 곡남리 시냇물을 건너 송촌(松村)부락에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중봉, 조헌(重峰, 趙憲)이 우거하던 곳으로 암석으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봉우리에 낙낙장송이 우거져 있고 그 밑에 수심대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름은 중봉이 지은 것이며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이 바위에 써서 새긴 것이다. 이 수심대 옆에는 중봉의 부조묘가 있다.
문화재자료 태고사 대웅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청림동로 440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호 1976년 태고사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대둔산 낙조대(大屯山落照臺)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고, 고려시대 태고화상(太古和尙)이 중창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재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절에서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이수학하였다고 전하며, 절 입구의 바위에석문(石門)이라는 우암의 필적이 움푹 들어가게 새겨져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에모시고 그 좌우에 문수(文殊)보현보살(普賢菩薩)을 모신 건물이다. 이 절의 대웅전은 원래1,200년의 역사와 72칸의 웅장함을 자랑하던 건물이었으나, 6.25 전쟁 중에 불에 타 없어졌으며, 1976년에 복원된 현재의 대웅전은 목조건물에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문화재자료 고경명 선생 비 충남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522-15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호 조선말기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霽峰高敬命)선생이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순절한 사실을 새긴 비이다. 선생은 1558년 (명종13년)에 문과에 장원한 후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에 이르렀는데, 서인(西人)이 몰락할 때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光州)에서 모집한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1592년 7월 10일에 금산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우다 눈벌(臥隱坪)에서 전사하였다. 효종 때 금산군수 여필관(呂必寬)이 비문을 지어 선생이 전사한 곳의 건너편 산기슭에 순절비(殉節碑)를 세웠으나,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비가 파괴되었다. 비석의 파편을 한식(韓式) 비각(碑閣) 안에 정리하였고, 1952년 후손들이 여필관의 비문을 다시 새겨복원하였다. 현재 1962년에 세워진 석조(石造)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다.
문화재자료 의선각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30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호 조선후기 의병승장(義兵僧將) 영규대사(靈圭大師)가 머물던곳으로, 보석사 대웅전(寶石寺大雄殿)의 왼쪽 옆에있는 건물이다. 대사는 공주 계룡면 출신으로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와 보석사를 왕래하면서 수도(修道) 생활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중봉조헌(重峰趙憲) 선생의 의병과 힘을 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한 후, 1592년 8월 18일에 금산에 주둔하던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의선각에는 창녕위 김병주(昌寧尉金炳疇)의 글씨로된의선각(毅禪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건물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보석사 입구에는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가 있다.
문화재자료 덕산사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배정이길 41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1호 1961년 밀양 박씨(密陽朴氏) 눌재 박증영(訥齋朴增榮), 강수 박훈, 퇴우당 박사현(退憂堂朴嗣賢) 세 분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이다. 눌재는 예종과 성종때의 문신으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공로가 컸고, 아들 강수는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禍)를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분이며, 강수의 손자 퇴우당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重峰趙憲)의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전사한 충신(忠臣)이다. 이 세 분의 충절과 공훈을 우러러 사모하여 1961년에 유림과 후손들이 사우를 짓고 매년 봄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건물은 15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다. 사우 앞에는 삼문(三門), 비(碑) 등이 있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쓴 덕산사(德山祠)의 액자를 내려주었다.
문화재자료 귀암사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평촌1길 2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1호 1922년 남원 양씨(南原 梁氏) 문양공 눌재 양성지(文襄公 訥齋 梁誠之) 선생을 배향한 사우로서, 평촌리 귀래봉(歸來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눌재 선생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신으로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5대 40여 년간에 걸쳐 벼슬하며 집현전 학사,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맡아 빛나는 공적(功績)과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선생의 6세손인 천음 응해(天蔭 應海)가 이곳에 정착하여, 귀암사숙(龜巖私塾)을열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1933년 이 사숙의 터에 눌재 선생의 높은 학문을 우러러 사모하여 유림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1922년 가을에 귀암사를 건립하여 봄과 가을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묘정(廟廷)에는 선생의 행적과 공훈을 새긴 눌재 양선생묘비(訥齋梁先生廟碑)가 건립되었고, 그 옆에는 거북이 모양의 귀암(龜巖)이 지금도 남아있다.
문화재자료 아인리 석탑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용머리길 29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7호 고려시대 탑은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사리(舍利)를 봉안할 목적으로 만든 건축물을 일컫지만, 넓게는 승려(僧侶)의 사리를봉안한 것도 포함된다. 이 탑은 금산읍 아인리 금산산업고등학교와 금산동중학교 사이에 있는 높이 200cm의 3층 석탑이다. 받침돌에 비해서 지붕돌과 몸돌의 규모가 작은 편이고, 2층 몸돌이 없는 상태에서 1층 지붕돌 위에 2층 지붕돌이 얹혀 있는 상태이다. 주변에서금귀대덕(金貴大德)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 대덕은 신라시대에 스님을 높여 부르던 말이며, 고려시대에는 승과제도(僧科制度)에 따른 서열(序列)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이 탑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자료 탑선리 석탑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탑선길 36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6호 고려시대 탑선리 석탑은 금산읍 중도리 탑선 마을에 있는 석탑으로, 탑 부근에 사찰(寺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고증할 수는 없다. 탑은 3층으로길이가 220cm정도이고, 탑의 규모에 비해 기단이 높은 편이며, 각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약간 훼손된 상태이다. 받침돌과 지붕돌이 반전된 모양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추정되나, 오랜 세월이 지나 허물어져 있던 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세웠다.
문화재자료 금산 천내리 고인돌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479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5호 청동기시대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한다. 이 고인돌이 있는 자리는 일용골 마을 뒷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낮은 구릉성(丘陵性)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용화리에서 흘러 내려오던 금강의 물줄기가 이 구릉을 S자 형태로 휘어돌아 충청북도 영동쪽으로 빠져나가면서 금산읍에서 나오는 봉황천과 천내천이 합류하고 있다. 구릉의 정상 능선을 따라 고인돌이 3~4기씩 길게 늘어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모두 12기가 확인된다. 덮개돌은 사각형(四角形) 또는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200cm 안팎의 크기로, 주변에서 돌칼, 돌화살촉, 붉은색을 띤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문화재자료 금산 용화리 고인돌 충남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502-1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6호 청동기시대 금산 용화리 고인돌이 있는 자리는 구릉성(丘陵性) 산지인 아랫말 뒷산 언덕으로서, 용화들과 용강(龍江)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이다. 남북으로형성된 구릉을 따라 3~8m가량 거리르 두고 3기가 일렬로 모두 덮개돌만 놓여 있다. 덮개돌의 형태는 타원형 또는 직사각형이며 크기도150~280cm내외로 비교적 작은 편이고, 부근에서 20여 점의 돌칼과 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곳이활터로서 정자(亭子)가 있었으며, 일제시대까지도 수 백년된 느티나무가 있어 놀이터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문화재자료 금산 대원정사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비범3길 17 일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7호 조선시대 대원정사는 원래 하신리 온양 이씨 어필각(溫陽李氏御筆閣) 인근에 있었으나, 일제시대 때현재의 위치에서 약 100m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가 1982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내부에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의 뒷칸에 불단(佛壇)을 조성한 후, 신안사(身安寺)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는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을봉안하고 있다.정면 3칸에 달려 있는 창호(窓戶) 중 특히 중앙칸의 창호는 정교한 쌍여닫이 연꽃살문으로 처리하여 많은 정성을 들인 것이다. 건물구조는 길게 다듬은 돌로 된 기단(基壇) 위에 높이93cm의 초석(礎石)을 놓고 짧은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이 주춧돌의 모양이나 재질로 보아창건 당시의 것이 아니고 옮겨 지을 때 기둥 아래 부분의 부패 방지를 위하여 교환한 것으로추정된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자료 금산 미륵사 석조 충남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 601 문화재자료 제409호 고려시대 추정 금산 미륵사석조는 일반적인 테를 갖고, 남쪽 상단부에 낙수홈대를 마련하였고 내부 바닥 가운데에 물을 빼는 배수구멍이 있다. 낙수홈대는 밖으로 돌출되게 만들었고, 동쪽 벽의 위쪽을 오목하게 파서 물이 넘치지 않게 흘러 나가도록 하였으며 동쪽 벽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있다. 길이 237㎝, 너비 150㎝, 내면 깊이 55㎝이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사찰 신안사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신안사로 970 일원 전통사찰 제3호 정보 미제공 신안리 동북쪽에 있는 해발 677m의 신음산 국사봉에서 내려온 지맥의 산록에 있는 이 절은 신라26대진평왕 5년인 583년 무염선사가 창건했다. 신안사라는 이름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제위 927년-935년)이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영국사에서수학할 때 이절에 가끔 들러 유숙하였는데 천태산국사봉을 배경으로 주위환경이 산자수명하고 정적한 유수경으로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고하여 신안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가람고에는 각각 현존 사찰로 분류 되어있어 16세기 무렵부터 18세기까지 사세를 유지하고이었음이 확인된다. 이절에는 대광전, 진향각, 극락전, 요묵당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광전(충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과 극락전(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77호)만이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불상은 10기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병화로 소실되어 태고사 등으로 5기를 이봉하고현재 5기만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단정 우아한 모습은 참배자에게 불심을 일으키게 하는 조선 전기미술의 걸작품이라 한다. 이 절이 흥할 때에는 반승3,000여 명이 수학하였다고 하며 불경, 불기 등 여러 가지 비품이 많았는데 6.25 전쟁을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어 찾을 길이 없고 산곡의 명미함과 절 앞의 심연 단폭과 20리에 뻗친 계곡의정만이 이곳의 옛 영화를 증언하는 듯 조용히 의연한 금도를 지키고 있다. 결국 지금의 가람 형태는 진향각, 요묵당 등이 있던 과거의 규모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칠층석탑 1기와 부도 2기가 남아있다. 극락전은 조선 후기의 건물로써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모시고,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신 건물이다. 건축양식은 자연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배흘림 맞배지붕으로 다포계양식의 내4출목의 포작으로 되어있다. 정면의 중간칸에는 빗살창을 하고, 좌.우칸에는 정자살창을 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뒷면 중앙에 내고주를 세워 여기에 후불벽화 불단을 조성하였다. 탱화는 1935년에조성된 것이다. 대광전은 석가모니께서 설법진리를 형상화한 비로나자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석가여래를 모시고 있다. 건물은 조선 후기 건물로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그 중 3칸에는 후불벽화불단을 조성하였다. 현재 일부가 보수되어 주변의 정리된 건물들과 함께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신안사는 입구의 중심선을 축으로 좌우대칭으로 쌓여있는 진입부근의 석축부터가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든다. 건물이나 주변환경이 아직은 때묻지 않은 청소함을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전통사찰 보석사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30 일원 전통사찰 제5호 정보 미제공 보석사는 금산군 남이면의 진악산(進樂山)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신라 헌강왕 11년(885)에 조구선사(祖丘禪師)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절 앞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 한다.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때 명성황후가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는 한국불교 31본산의하나가 되어 전라북도 일원에 있는 33개의 말사를 관장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의선각.기허당.요사채 등의 당우(堂宇)가 남아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의선각(毅禪閣,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을도와 승병대장으로 활동하던 영규대사(靈圭大師)가 머물러 수도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전통사찰 영천암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148 일원 전통사찰 제73호 정보 미제공 영천암(靈泉庵)은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진악산(進樂山)에 자리하고 있으며, 보석사의 북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사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칠성각의 뒷편에 있는 샘물인 영천(靈泉)이 특히 유명한데,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영험설화도 함께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곳이다. 현재 가람의 규모는 암자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소규모의 도량이다. 이 암자의 역사라든가 이 암자가 어느 사찰에 부속되어 있었던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내용이 없다. 지리적 연관성으로 보아 보석사의 부속 암자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무렵의 보석사 소속 34개 사암 목록에서 영천암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진악산 남쪽 산중 보석사에서 2㎞쯤 산중으로 들어간 지점에 있으며, 신라 헌강왕 원년(886) 보석사와 같은 연대에 조구화상이 도를 닦을 곳으로 세운 절이다. 이 절 뒤 굴에서 석수(지하수)가 끊임없이 솟아올라아픈 사람에게 특효가 있는 영험한 샘이라고하여영천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한다. 이 절에는 무량수각과 칠성각이 있으며 주위를 뒤덮은 울창한 숲과 흐르는 맑은 시냇물은 신선이 사는 곳에 온 듯한 느낌을 주어 관광객을 위로해 준다.
전통사찰 태고사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청림동로 440 일원 전통사찰 제4호 정보 미제공 태고사는 대둔산(大芚山) 마천대(摩天臺) 밑의 능선에 위치한 절로,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절터를 본 원효대사가 너무 기뻐 3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할 만큼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고려시대 태고화상(太古和尙)이 중창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진묵대사가 재건하였다고한다. 또한 조선시대의 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수학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절 입구의 암벽에 새겨진 석문(石門)이라는글씨도 그가 쓴 것이라 한다. 경내의 건물은 1950년 6.25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는데, 이후 3칸 규모로 집을 지어 불상을 모셔오다가 1976년 무량수전, 관음전 등과 함께 대웅전을 복원하였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봉안되어 있다.
전통사찰 서대사(구)원흥사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서대동기길 120 일원 전통사찰 제 60호 정보 미제공 원흥사(元興寺)는 금산군 추부면 서태리 서대산(西臺山)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현재의 전각은 모두 근대 이후에조성된 것들이며, 1931년 김만덕화 보살이 옛 서대사(西臺寺) 터에 새롭게 창건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실제로『신증동국여지승람』의「금산군」조에는, 옛날에는 상.중.하 세 개의 서대사가 있었는데, 중서대사는 지금 없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본다면 16세기 초반무렵까지 상.하 서대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가람고』에는, 군에서 동쪽으로 40리 지점에 서대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18세기 후반까지 사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1931년 옛 서대사터에 원흥사를 새롭게 세웠다고 하는부분은 역사적 사실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원흥사가 세 개의 상대사터 가운데 어느 곳에 세워진 것인지, 또는 상.하서대사가 어느 시기까지 존속하다 폐사로 바뀌었는지 하는 등의 내용에 대해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경내 축대의 외곽에 있는 부도 2기를 제외하면 옛 서대사와 관련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비록 현대에 들어와 1980년 조성된것이기는 하지만, 21척 높이의 석조미륵입상이 이 곳을 찾는 참배객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전통사찰 미륵사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동구들길 163 일원 전통사찰 제85호 정보 미제공 재단법인 선학원 분원이다. 성덕대왕 2년(703) 창건되었으며, 1948년 소실되기 전에는 대웅전과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을 갖추고 있었다. 경내에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문화재자료 제409호)가 있으며, 건물 뒤편에는 양감이 풍부하며 선각이 유려한 석조불두 및 마애불편 일괄(유형문화재 제209호)이 있다.
금산향토유적 개삼각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개삼로 101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1호 정보 미제공 최초로 인삼을 심은 곳이라 하여 개삼터로 불리며 전설이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강씨성을 가진 처사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모친마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진악산 관음굴에서 정성을 들여 모친의쾌유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 속에서 산신령이 현몽하여, 관암불봉 암벽에 가면 빨간 열매 3개 달린풀이 있을 것이니, 그 뿌리를 달여 드려라는 계시가 있어 그 곳을 찾아가니, 과연 그러한 풀이 있었다. 그뿌리를 캐어 달여 드리니 모친의 병환은 완쾌되었고 그 씨앗은 지금의 남이면 성곡리 개안 부락에 심어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는 처음 재배하게 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당시 그 씨앗은 3개가 달리고 겉모습이 사람의 형태와 비슷하다하여 인삼이라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500여 년 전에 최초로 인삼을 심은 터에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 7월에 개삼각을 지었으며, 개삼각의 안에는 진악산산신령이 강처사에게 인삼을 하사하는 그림이 있다. 그리고 개삼각 앞에는 강처사가 살던 고택을 재현해 놓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년 금산의 향토축제인 금산인삼축제행사시 인삼을 처음 재배케 해준 진악산 산신령에 대한 제사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인삼제전을 군민의 정성을 모아 올리고있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인삼축제로 자리매김 하면서 세계인이 참여, 체험하는 축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금산향토유적 영천암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보석사1길 148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4호 정보 미제공 남이면 석동리 진악산 남쪽 보석사에서2km쯤 산중으로 들어간 지점에 있다. 이 사찰도 보석사와 같은 연대에 조구화상이 수도장으로 창건한 절이다. 영천암이라는 이름은 절 뒤 암굴에서 석간수가 끊임없이 솟아올라 이 물이 병자에게 특효가 있는 영험한 샘이라고 하여영천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금산향토유적 원효암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진악로 428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5호 삼국시대 이 절은 진악산 최고봉인 관앙불봉(觀仰佛峰) 남쪽에 있는 절로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조구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산이 깊고 조용하며 절 앞의 개울 물은 20여 m의 폭포를 이루며 봉수대가 있는 관앙불봉을 뒤로 하고 좌우에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있다.
금산향토유적 숭모사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마장길 158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6호 정보 미제공 남일면 마장리에 자리 잡고 있는 숭모사와 삼세충의(三世忠義)비는 고려말 조선초(高麗末朝鮮初)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태종의간곡한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세상에서 은둔한도소재 박힐(逃召齋朴詰)과 세조의 탈권에 항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은둔자정한 의율재 박인(擬栗齎朴麟) 및 그 아들임희당 박희권(臨淮堂朴希權)의 3세에 걸친 세분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다.
금산향토유적 어풍대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 산14 금산군 향토유적 제8호 정보 미제공 제원면 제원리 마을입구의 금산과 영동을잇는 도로 왼쪽에 암석을 깎은 듯이 절벽이이루어져, 자연비(自然碑)처럼 되어 있고, 어풍대라는 글자가 새겨겨 있는데 재미난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이조 선조 때에 허목(許穆1595~1682)이제원역의 찰방으로 있을 때 화재가 자주 일어나 이를 막기 위하여 바위에 어풍대(御風臺)라 새긴 후부터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금산향토유적 세마지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 산14 금산군 향토유적 제9호 정보 미제공 제원면 제원리 마을입구에 어풍대 바로 옆에 세마지(洗馬池)라고해서(楷書)로 새긴 글씨가 뚜렷이보인다. 그 밑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옛날에는 큰 못으로제원역에서 기르는 말을 씻긴 곳이라 전한다. ※역(驛) : 옛날의 교통 통신기관으로 30리마다 설치하고, 말과인력으로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였던 국가기관.
금산향토유적 백암느티나무 충남 금산군 복수면 백암리도로 732 금산군 향토유적 제10호 정보 미제공 복수면 백암리 518번지에는 수령이 500여 년 되고 수고(樹高)가 35m, 흉고(胸高) 둘레가 9.4m인 괴목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어 사람들은 이를 쌍괴정(雙槐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나무는 언제 누가 심어서 가꾸었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복수면 백암리와 진산면 지방리를 넘나드는 개티고개를 넘어서 복수면의 고개 밑에 위치하여 이 나무의 그늘은 지나가는 길손과 동네 노인들 및 어린이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금산향토유적 홍범식군수순절비 충남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산46-1 홍범식공원내 금산군 향토유적 제11호 정보 미제공 홍범식군수순절비는 1871년 7월 23일 충북 괴산에서태어나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한 이듬해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못이겨 자결한홍범식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한일합방시 금산군수였던 홍범식은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넘어가는 것을 한탄한 나머지 자결한민영환처럼 저승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 오명이되지 않겠다는 유서와 함께 사직을 지키지 못한 것을 용서해달라는 상소문을 조정에 보내고 금산 객사에서 자결하려 하였으나 종자에게 들켜서 뜻을이루지 못하다가 종자들의 감시를 피하여 조종산에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요배한 다음 순절하였다. 당초 순절비는 1949년 금산읍 중앙지에 세웠다가 1976년 남산으로 다시 옮겨 세웠으며2008년 순절지인 조종산 부근 상옥리 산46-1번지에 홍범식공원으로 지정한 후 순절비와순절지비를 옮겨 세웠다. 한일합방 때 우리나라에는 360여 명의 군수가 있었으나 정충대절의 절개를 지킨 군수는금산군수 한 사람뿐이었다.
금산향토유적 경주 김씨 효열비각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대산길 101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12호 정보 미제공 경주 김씨(慶州 金氏)는 대산리 김헌동의 집으로 출가하여 다리도 잘 못쓰는 소아마비 남편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남편이 사망하자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삼베치마를 입고 예를 지켰으며, 개가할 권유도 여러 번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제삿날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며 슬퍼했다는 열녀다. 1936년 김씨문중(金氏門中)에서 유림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서 효열상(孝烈賞)을 내주어 그 효행을 널리 기르기 위하여 비각을 건립했다. (출처:『여기가 금산이다』, 忠淸南道鄕土文化硏究所, 1992)
금산향토유적 유곡사 금산군 금성면 서원모정길 54-8 금산군 향토유적 제17호 정보 미제공 금성면 하류리 유곡(柳谷)에 있는 사당으로 유곡사에는 문충공 한교(文忠公韓), 유곡 이유택(柳谷李惟澤) 두분의 효자 현인을 모신 사당이다. 유곡사는 현종 15년(1674년)에 건립되었으며 숙종 28년(1702년)에 유곡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복호 2결을 내려 자손만대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1871년(고종 8년)에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후손과 지역유림이 1964년 복원하여 해마다 지방 유림에서 음력 3월 21일 제향을 지낸다.
금산향토유적 대산사 충남 금산군 제원면 대산리308 금산군 향토유적 제14호 정보 미제공 제원면 대산리에 있는 영산신씨의 문중사당이다. 덕재 신천(德齋辛), 극재 신인거(克齋辛引), 응청당 신정(凝淸堂辛靖) 3위를 배향하고있다. 이 사당은 1959년에 건립되었다가 2008년에 중건하였다.
금산향토유적 정의사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봉황로 73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18호 정보 미제공 남일면 초현리에 있는 현풍곽씨의 사당으로 단묘충신(端廟忠臣) 곽사(郭師)를 모신 사당이다. 공은 세종조에 등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이르렀으나 세조의 탈권으로 단종이 영월에서 해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아들 득창과 함께 금산의 옥황동에 와서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단종의 원혼을 위로하고 일생을 초야에 묻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의사는 공의 위와 같은 충절을 숭모하여 지방 유림과 후손의 정성으로1957년에 건립한 것이며, 공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10월 25일에 제사를 지낸다.
금산향토유적 정충사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삼태2길 33-4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19호 정보 미제공 남일면 마장리 삼태부락 산밑에 있는 사당으로, 충신 양제(梁齊)를 모신 곳이다. 양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켜 큰 공을 세우고 적의 최후공격에 성이 빼앗겨 촉석루에서 남강에 투신자결한 충신으로 진주 창열사(彰烈祠)에도 배향돼 있다. 이 사당은 1937년 건축된 것으로 해마다 지방 유림에서 음력 8월 12일 추향제를 모시고 있다
금산향토유적 귀봉사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흑암길 6-12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13호 정보 미제공 1964년에 건립된 귀봉사(龜峰祠)는 남이면 흑암리에 위치한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문중사당으로 흥무왕 김유신(興武王金庾臣), 평장사공김란(平章事公金蘭), 절효공 김극일(節孝公金克一), 안경공 김영정(安敬公金永貞), 의헌공 김예직(毅憲公金禮直) 등 5위를 배향한 사우이다.해마다 지역유림이 음력 3월 3일에 제사를 지낸다.
금산향토유적 숭절사 충남 금산군 남이면 흑암리159-1 금산군 향토유적 제16호 정보 미제공 숭절사는 조선초 단종 때 이조판서 묵재 김종한(默齋金宗漢)선생과 좌의정 절재 김종서(節齋金宗瑞)선생 형제분을 모신 사우이다. 묵재 선생은 문종 때에 이조판서에 배수(拜受)되었으며 단종 원년(1453년)에 수양대군에 의한 계유정란에 아우인 절재 김종서와 함께 유배되어 순절하였으며 묘소는 부리면 수통리(島波)에 있다. 절재 선생은 세종 15년(1433년)에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육진을 개척하였으며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 중 계유정란에 수양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으며, 묘소는 공주군 장기면 대교리에 있다. 1979년에 건립하였고 유림들에 의해 매년 음력 9월 24일 향사되고 있다.
금산향토유적 숭의재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내부길 33-45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15호 정보 미제공 숭의재는 고려말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弘文館 藝文館大提學) 천안전씨대제학공파(天安全氏大提學公波) 전익(全翊)의 5세손 대호군(大護軍) 전충로(全忠老)를 배향한 사당이다. 전충로는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금산으로 입향(入鄕)하여 뿌리를 내렸다. 숭의재는 1954년 개축하여 충효예교실로 병용(倂用)하고 있으며, 매년 10월 4일 시향을 올린다. (출처:「錦山의 天安全氏大提學公波 脈과 뿌리」)
금산향토유적 청주한씨정려각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406-11 금산군 향토유적 제20호 정보 미제공 정부인 한씨는 청주한공 사의(淸州韓公 師義)의 딸로서 강라영(姜羅永)과 혼인하여 공경과 예로서 시부모와 남편을 극진히 받들었다. 시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날 때에는 손가락을 찢어 피를 내어 먹여 몇 년을 더 살게 하였으며, 시어머니가 돌아가심에 삼년 동안 고기 먹는 것을 끊었다. 시할아버지께서 병에 걸렸을 때는 4년간을 밤마다 하늘 자신이 대신할 것을 빌었다. 54세에 돌아가시니 향리의 유생들이 상주(上奏)하여 1892년(고종 29)에 명정(命旌)이 내려졌다. 명문에는 孝婦 贈嘉先大夫禮曹判書 姜羅永之妻 贈貞夫人 淸州韓氏之閭라 되어 있다. 손자 형대(亨大)가 이 각을 세우고, 정려기(旌閭記)를 찬하였다.(출처:『晉州姜氏 大田光域市宗會 三十年史』, 晉州姜氏 大田光域市宗會, 2004)
금산향토유적 현덕사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어필각로 197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21호 정보 미제공 현덕사는 조선 전기의 문신 박흥생(朴興生)을 배향한 사당이다. 박흥생(1374~1446)의 자는 경부(敬夫), 호는 국당(菊堂)으로, 여흥부(驪興府), 춘천부(春川府) 교수敎授)를 역임하였고, 1423년(세종 5) 평창현령(平昌縣令)을 제수받았다. 효행이 지극하여 정려(旌閭)를 받고 학행과 문장이 뛰어나 당시 거유(巨儒) 목은이색(牧隱李穡),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선생이 천양(闡揚)하였다고 한다. 대표적 저서 ≪촬요신서(撮要新書)≫와 한시(漢詩) 십여 편이 전하고 있다. 현덕사는 1980년 건립되었으며, 매년 음력 10월 4일 향사한다.(출처:「世德祠誌」, 密陽朴氏僕射公派大同宗約所「朴菊堂興生先生行狀」, 密陽朴氏廣州公派宗親會)
금산향토유적 형수당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내부길 30-6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22호 정보 미제공 형수당은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한 전유(全瑜), 전완(全琬), 전구(全球) 삼형제를 배향한 사당이다. 삼형제는 대현(大賢)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문하에 수학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형제가 한 집안에 같이 살면서 힘을 다해서 부모봉양과 형제 우애를 위해서만 힘썼다고 전한다. 어버이가 돌아가셨을 때 50세가 넘은 나이였으나 슬피 울음과 사모함이 주위 사람까지 감동하였고, 상식 올리는 예의와 거처의 변경하는 절차를 한결같이 옛 법을 따르고 석 달 동안을 미음만 먹고 3년 동안 맨밥을 먹으며 담사(祀)때가지도 예를 갖추어서 변하지 않았다.

송시열선생이 형수당이란 당호를 직접 써주었는데, 이는 중국 제나라 때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한 전진(田眞) 삼형제의 집에 영고성쇠를 의미하는 자주빛 박태기나무〔紫荊樹〕가 있었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1682년 7월 송시열의 손자인 송주석(宋疇錫)이 형수당기(紫荊堂記)를 지었고, 1726년에 전유의 아들 전덕병(全德炳)이 형수당이란 세 글자와 기문(記文)을 그 당시 금산군수였던 김시발에게 간청하여 군수는 글을 써주었고 이를 새기어 초당에 걸었다. 현판은 퇴색하고 부식하여 1998년에 다시 새기어 걸었고 원판은 사당 안에 보관하고 있다.
(출처 : 荊樹堂)
금산향토유적 황풍사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황풍2길 13 일원 금산군 향토유적 제23호 정보 미제공 황풍사는 금산김씨(錦山金氏)의 시조 낙천재 김신(樂天齋 金侁)을 배향한 사당이다. 김신은 고종 때 문과에 급제,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을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원종 때에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 공훈을 세워 요양행성참정(遼陽行省參政)을 제수받고 고려에 돌아왔을 때에 그의 고향인 진례현(進禮縣)이 금주군(錦州君)으로 승격되었다. 1274년(원종 15) 원나라와 고려가 일본을 정벌할 때 정동대장군으로 출정하여 많은 적을 정벌하였으나, 일기도(日岐島)에서 순국하였다. 낙천재를 모신 성곡서원(星谷書院)이 1871년(고종 8) 철폐된 후, 청풍서원(淸風書院)에 길재선생과 같이 추배하였다가 그 후손이 1953년에 황풍사를 건립하고 매년 음력 10월 19일에 배향한다. 사당 앞에는 만리황풍비(萬里皇風卑)가 세워져 공의 행장을 기록하고 있는데 만리황풍은 원나라 성종황제(成宗皇帝)의 황은(皇恩)이 만리(萬里)까지 뻗쳤다는 뜻으로 공이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성종황제가 석별(惜別)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친필(親筆)로 써서 공에게 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 필적은 병란에 소실되어 전하지 못한다고 한다.(출처:『여기가 금산이다』,忠淸南道鄕土文化硏究所,1992 『錦山郡誌』, 錦山郡誌編纂委員會, 1987)
금산향토유적 영산신씨정려각 충남 금산군 군북면 내부리 463-3 금산군 향토유적 제24호 정보 미제공 영산 신씨(靈山 辛氏)는 신흥환(辛興煥)의 딸로 전기평(全基平)의 아내이다. 시집간 후 불과 몇 해가 되지 않은 17세에 남편이 죽자 그 남편의 뒤를 따라 목매어 자결하였다. 사림(士林)에서 이를 포상하고 정각을 세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출처:『금산군지』, 금산군지편찬위원회, 1969)
등록문화재 금산위성통신 제1지구국 안테나설비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가래울길 117 등록문화재 제436호 건립년도:1969년 1969년 미국 필코포드사(Philco Ford)에서 제작된 안테나설비로 1970년 충남 금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통신지구국이 건설된 후 개통되었으며, 카세그레인 안테나(Cassegrain antenna)라 불리는 이 안테나는 주반사판, 부반사판, 안테나 지지타워, 안테나 구동장치 등으로 구성됐다. 태평양 상공의 인텔샛(Intelsat)3호 위성을 이용해 미국, 홍콩, 대만 등 태평양연안 7개 국가간 136회선의 국제통신망을 구축하여 우리나라 국제통신 발달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술적, 사료적 가치가 크다.
등록문화재 천주교 진산 성지 성당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 등록문화재 제682호 건립년도 : 1927 진산지역은 조선조 후기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 받은 윤지충이 가족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한 곳으로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최초의 박해였던 신해박해 이후 1887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어 천주교인들이 다시 모일 수 있게 되자 공소형태로 종교집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민가에서부터 시작된 교회건물이 몇 차례 지어 졌고 1927년에 건립된 성당건물이 현재까지 미사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신해박해 때 순교한 두 신도 윤지충, 권상연이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됨으로써 천주교이 성지로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은 동서로 긴 축을 가진 랑식 바실리카 형식으로 맞배지붕중앙종탑의 중규모 성당건축의 전형적 모습을 하고 있다. 목조구조는 내외부에 모두 노출되어 있는데 내부에서는 중앙통로의 상부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들이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더욱 차분한 느낌의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이 설치되어 있지는 않지만 양쪽의 측랑보다 높은 지붕을 설치하여 기본적인 바실리카식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벽기둥 사이의 공간은 징두리를 상부를 모두 유리창으로 마련하여 밝은 분위기의 성당내부를 연출하고 있다. 주출입구 상부에는 중층을 두어 성가대석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외벽은 원래 비늘판 벽이었으나 후에 몰탈을 덧 씌웠고 종탑 또한 목조였으나 1983년 철거하고 시멘트벽돌 조로 새로 만들고 현관도 새롭게 덧붙였다원래 남녀 구분된 현관이 양쪽에 있었는데 가운데로 합쳤고 양옆의 공간은 고해실과 준비실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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